여행 및 행사/해외여행 및 산행

캄보디아, 베트남. [2]

실미도 2011. 1. 14. 17:22

베트남(1월7일, 8일)

☞ 출국한 날 : 2011. 01. 04. 화요일 ☞ 입국한 날 : 2011. 01. 09. 일요일 ☞ 함께한 이 : "한알회" 회원 부부동반 ☞ 여행한 곳 : 다낭, 후에, 호이안 2011. 01. 07. [응우엔왕조의 후에 왕궁, 티엔무 사원, 뜨득황릉, 카이딘황릉] 어제 밤 숙소인 샌디리조트에 도착하여 새벽에는 해변을 산책하기로하고 모닝콜 전에 일어나 밖을 보니 비바람이 몰아친다. 오늘 일정을 걱정하고 있는데 날이 밝아오고 비가 멎는다. 식당에 내려가 아침을 먹고 약한 비바람을 맞으며 해변을 잠시 거닐어 본다. 짐을 챙겨 버스를 타고 한국의 경주와 같은, 베트남의 과거가 살아 숨쉬는 곳이라는 응우엔왕조의 왕궁과 왕릉이 있는 '후에'로 이동한다. 하이반 고개를 넘어야 하는데 날씨가 나빠 위험하다고 갈때는 터널을 통해 가고 올때 날씨를 봐서 하이반 고개를 넘어 다낭으로 온단다. 거의 3시간이 걸려서 '후에'에 도착하여 점심식사. 후에 왕궁에 오는 중에도 비가 오다 그치기를 반복하여 가이드가 비옷을 사왔는데 입는 중에 거의 찢어진다. 다시 하나에 2달러씩 주고 2단 우산을 샀는데 이것도 영 시원치가 않다. 하루의 일정을 마치고 호텔에 짐을 풀고 가이드에게 이곳 서민들이 이용하는 선술집에 가고싶다고 하니 위험하다며 호텔직원에게 물어 직접 데려다주고 안주와 술도 시켜주고 간다. 쌀국수에 들어가는 소고기와 이곳 소주 몇병을 먹고 11달러를 계산하였다. 현지시간 07시09분, 창박에는 비바람이 불고 허연 파도가 일렁거린다.

    바닷가에 나가고 싶어하는 반쪽이와 잠시 해변에 나와 본다. 야자수 나뭇잎으로 만든 비치 파라솔과 등받이 의자가 운치가 있다.
    해변의 모래의 입자가 너무 고와 차라리 먼지같다. 그래서 파도가 일면 물이 뿌옇게 된단다.
    후에로 가는 길에 주유소에 들린다. 1달러가 약19,000동인데, 1리터에 1,475동이니 무지무지 싸다.
    호치민에서 하노이까지 2천km가 넘는다는 철도. 협궤(레일폭이 좁다)이고 단선이다. 열차 보기가 쉽지 않아 기차를 보면 복권을 산다나...
    ☞ 응우엔왕조의 후에 왕궁 ☜ 1802년부터 1945년까지 13대에 걸쳐 이어진 응우옌 왕조의 왕궁은 성벽으로 둘러싸여 있는 요새이자 궁전이다. 이곳의 뜰은 가로 세로 각각 2킬로미터, 높이 5미터의 성벽으로 둘러싸여 있었고 그 성벽은 다시, 해자로 둘러싸여 있었다. 해자에 담을 물은 후에를 관통하여 흐르는 흐엉강에서 끌어왔다. 이러한 구조물을 시터들(citadel)이라고 한다. 시터들 안에는 거의 2.5킬로미터의 방어선을 구축한 왕궁이 있었다. 대개의 관광객이 입장하는 왕궁의 정문인 남문 누각에 오르면 왕궁 전체가 한눈에 보인다. 남문 정면에 중국의 자금성을 본떠 지은 디엔타이호아(太和殿, 태화전)가 있으며 디엔타이호아의 왼쪽에 각 왕의 위패가 모셔진 사원인 현임각이 있다. 그 외에도 왕궁 안에는 왕족의 저택과 사원들, 황제를 위한 인클로져(enclosure)인 자금성이 있다. 그 명칭은 중국의 자금성을 본딴 것이다. 이름만을 본딴 것이 아니어서, 자금성에는 수많은 궁전과 문, 궁정들이 있었다. 자금성은 응우옌 왕조의 황족들을 위한 곳이었다. 베트남 전쟁 당시, 후에는 북베트남과 남베트남의 경계에 매우 가까운 곳에 위치하였고 매우 중요한 요새 역할을 하였다. 후에는 그 경계의 남쪽, 즉 남베트남에 속해 있었는데, 후에 전투에 속하는 1968년 뗏(Tết) 공세 때, 이 도시는 물리적으로도 심각하게 피해를 입었을 뿐만 아니라, 그 명성도 손상되었다. 역사적으로 유서 깊은 건물에 미군이 폭격을 가하여 역사적인 유물과 유적이 송두리째 파괴되었다. 또한 공산주의 세력에 의하여, 악명높은 후에 학살(massacre at Huế)이 자행되었다. 전쟁이 끝나고 난 뒤에도 상당 기간 동안 "봉건 시대의 유산"이라는 이유로, 역사 유적 복원과 봉건 유적에 대한 관심이 미비하여 한동안 방치되었다. 베트남 정부의 정책 쇄신을 통해 중세 왕조의 유적 복원 작업이 완료 혹은 진행 단계에 머물고 있다. -위키백과- 성벽을 둘러사고 있는 해자를 건너는 다리를 건너 도성으로 들어간다
    왕궁의 깃대(Flag tower)가 보이고,해자에는 부레옥잠이 빼곡하게 자라고 있다.
    벽돌을 쌓아서 만든 성벽임을 알수있다.
    청동으로 만들어진것 같다.
    청동향로?
    아치 터널을 멋있게 잘 만들었다.
    ☞ 티엔무 사원 [Thien Mu Pagoda] ☜ 후에 시내에서 5km떨어진 흐엉강(香江)의 서쪽 강변 언덕에 세워진 후에에서 가장큰 사원이며 베트남의 대표적인 불교사원으로 1601년에 건립되었다. 절 입구에 세워져 있는 21.24m에 달하는 빛바랜 다홍색의 팔각형 7층 석탑이 유명합니다. 1884년에 티에우찌 황제가 세운 석탑으로 양옆에는 각각 대종과 석비가 놓여진 정자가 하나씩 있습니다. 종은 무게가 2t에 달하는데, 종소리가 후에 시내에까지 들린다고 합니다. 석비에는 사원의 유래가 쓰여 있습니다. 사원 앞으로 흐르는 흐엉강(香江)
        절 입구에 있는 높이 21m에 이르는 빛 바랜 다홍색의 8각 7층 석탑. 이 석탑은 1884년 티에우찌 황제가 세운 것이란다.
    분재와 분재를 담은 화분이 잘 어울린다.
    베트남 전쟁시 독재 정권인 응오 딘 디엠에 항의하는 듯으로 사이공에서 분신자살한 팃꽝득 스님이 사이공으로 가는데 이용했던 자동차가 전시되어 있다. 이 사건으로 미국의 여론이 돌아서게 되었고, 월남 정권에 대한 지원을 중단하게 되었단다.
          나무를 숙주로 기생하는 여러 종류의 식물들
    ☞ 뜨득황릉 ☜ 후에 중심부에서 남쪽으로 5㎞ 정도 떨어진 곳에 자리잡은 뜨득황제(Tu Duc·4대)의 능은 민망황제(Minh Mang·2대)의 능과 함께 후에에서 가장 아름답고 장대한 능으로 꼽힌다. 이곳의 주인인 뜨득(1829~1883) 황제는 응우옌 왕조 13명의 황제들 중에서 가장 오랜 기간인 35년간을 통치했던 인물이다. 그는 1864년부터 1867년까지 만 3년에 걸쳐 3천여명의 인원을 투입해 능을 완성한 뒤, 별장과 같은 이곳에서 호화로운 생활을 했다고 전해진다. 50명의 요리사들에 의해 만들어진 50종류의 요리를 50명의 하인의 시중을 받으며 식사를 했다는 이야기나, 연못 위에 떠있는 연꽃 잎에 밤새 맺힌 이슬을 모아 차를 마셨다는 이야기, 100명이 넘는 후궁을 거느리고 있었다는 내용 등으로 볼때 그의 화려했던 생활상을 엿볼 수 있다. 그러나 황후와 100명이 넘는 비빈들이 있었지만 자식이 단 한 명도 없어 만년의 삶을 더욱 힘들게 했다. 뜨득은 늘 자신의 삶이 저주받았다고 생각하며 미래에 본인이 묻히게 될 황릉을 찾아 허송 세월만 보냈던 것이다. (경인일보 홈페이지 발췌) 낡은 뜨득황릉 안내표지판
    루키엠(Luu Khiem)이라는 연못과 쑹키엠(Xung Khiem)이라 불리는 정자가 그한폭의 그림이다.
    화려하지만 고독했던 '뜨득황제'가 시를 읊곤 했던 연못과 정자
    정자로 건너가는 아치교
    우리나라의 왕릉처럼 양쪽에 대칭으로 석물(石物)들이 도열해 있다.
    문.무인석 4쌍과 코끼리와 말 한쌍이 도열해 있다.
    석조양식의 왕의 무덤, 황제 사후 도굴을 막기 위해 황릉 조성에 참여했던 인부들을 모두 처형하고, 실제 관은 다른 곳에 매장했단다.
    비각안에 커다란 비석이 있다.
    섬세한 기와와 화려한 치장 문양
    오랜 세월을 설명하는 담장과 이끼.
    ☞ 카이딘황릉 ☜ -. 동서양의 건축 기술이 결합한 카이딘 황릉 카이딘 황제는 별다른 업적도 남기지 못하고 국민들에게 고통만 안겨주고 세상을 떠났지만, 아이러니하게도 그의 능은 더없이 웅장하고 화려하기만 하다. 후에 교외에 위치한 카이딘 황릉은 1920년에 건설이 시작돼 11년만인 1931년에 완성됐다. 식민시절답게 전체적인 건축 틀은 프랑스의 영향을 많이 받았다. 카이딘 황제는 자신의 능 건설을 위해 1922년 직접 프랑스를 방문하기도 했으며, 그곳의 건축물들을 많이 참고해 황릉 건설에 반영했다. 사실 카이딘 황릉은 서양 건축기술이 중심이고 동양적 건축문화가 최소한으로 결합했다는 표현이 더 맞다고 느껴질 정도다. 무덤은 전체적으로 검은색과 회색의 콘크리트가 사용돼 무게감을 주며, 지붕에는 슬레이트와 연철(鍊鐵)이 사용됐다. 능 안에 있는 궁전에는 서양식 피뢰침과 전기를 사용하기도 했다. 무덤은 콘크리트와 함께 곳곳에 색조유리와 자기들로 덮여 있다. 궁전 천장은 동양적인 면모를 보이는데 용과 구름이 디자인돼 있다. 어떤 이들은 이런 카이딘 황릉을 놓고, 건축학적으로 베트남의 '신고전주의(neo classicism)'를 보여주는 작품이라고 칭송하기도 한다. (경인일보 홈페이지 발췌) 유럽의 중세의 고성(古城)에 들어서는 느낌이다.
    석조와 콘크리트로 된 고딕 양식의 건물과 첨탑들
    문무인석과 호위무사, 코끼리, 말의 석상이 도열해 있다.
          무척 화려하다.
    청동에다 금박을 입힌 카이딘 황제의 등신상(等身像), 이 등신상은 1920년 프랑스에서 제작된 것인데, 실제 카이딘 황제의 크기와 똑같이 만들었단다
    벽과 천장은 서양식 스테인드글라스처럼 금색 자기와 유리 모자이크로 화려하고 현란하게 꾸며져 있다.
    카이딘황릉을 나서며 앞산에 불상은 아닌것 같고..., 가이드도 모른단다.
    문.무인석 뒤의 6인의 호위무사와 코끼리, 말의 석상
    호텔이 잘 정돈되어 깨끗하다.
    2011. 01. 08. [하이반 고개, 호이안 고대도시, 마블 마운틴(오행산), 참조각 박물관, 씨클로 투어] 아침에 일어나니 다행히 비는 오지 않는다. 다시 다낭으로 이동하는 중에 세계 10대 미항중의 하나인 '랑코비치'를 지나 '하이반 고개'를 넘었다. 우리나라 한계령마냥 구불구불한 고갯길에 안개가 피어 오르고 아래로 바다가 내려다 보인다. 다낭에서 쌀국수 체인점으로 유명하다는, 미국 대통령도 들렸었다는 식당에서 쌀국수로 점심을 먹고 옛날에는 홍콩, 싱가포르와 더불어 동남아 지역의 중요 무역항이었다는 호이안 고대도시로 이동한다. 다낭에서 호이안으로 이어지는 해안에는 리조트를 비롯한 건설 현장이 끝없이 이어진다. 이곳에도 부동산 광풍이 일고있는가 보다. 다낭으로 돌아오는 길에 대리석으로 되어 있어 영어 이름으로는 마블 마운틴(marble mountain)이라고 불리는 오행산(물,나무,불,금속,땅)의 물을 의미하는 '투손'의 대리석 동굴의 지옥과 천당을 관광한다. 이 일대는 질 좋은 대리석으로 인해 마을 전체가 돌공예 단지다. 다낭에 돌아와 참박물관을 구경하고 씨클로를 타고 1시간 동안 시내 투어를 하는데 정신이 없다. 자동차와 수많은 오토바이, 자전거가 뒤섞여 서로 경음기를 경쟁적으로 울려대 귀가 멍멍하고, 뿜어져 내는 매연에 목이 칼칼하다. 저녁 식사후 재래시장을 구경하고 공항으로 이동하여 인천공항에 새벽 05시20분에 도착하였다. 농경지와 양식장이 바다와 가까이 접해있다
    오늘도 기차를 본다.
    하이반 고개로 올라가는 길에 들어선다. 뒤에 다리를 통과하면 터널로 들어간다.
    ☞ 하이반 고개 ☜ 후에에서 다낭으로 넘어가는 길목에 하이반(haivan)고개가 있다. 하이반 고개는 ' 바다 (Hai)' 와 ' 구름 (Van)' 이라는 이름 뜻으로, 세계에서 경치가 아름다운 고개 몇 곳에 꼽히는 곳이라 한다. 구불구불한 비탈길을 거슬러 해발 900m를 오르면 구름 사이로 짙푸른 해안을 한 눈에 볼 수 있다하며 베트남전 당시 전략 요충지로 이 고개를 사이에 두고 치열한 전투로 많은 사람들이 목숨을 잃었다 한다. 하이반 고개 정상에 오르는 길에 안개가 피어 오른다.
    정상의 휴계소 매점
    붉은 벽돌로 만든 성곽의 현판
    땅굴. 들여다 보니 5m쯤 이어지다 양쪽으로 갈라져 나아갔다.
    붉은 벽돌은 베트남 사람들이 만든 성곽이고. 시멘트 건물들은 미군이 만든 것이란다. 문화유적으로서 가치가 있는 시설물인데 군사시설로 사용했었다니...
    프랑스와의 전쟁, 일본과의 전쟁, 그리고 미국과의 전쟁에서 고루 치열한 전투가 일어났던 곳이다
    다낭으로 내려가는 길과 바다가 희미하게 보인다.
    고개를 내려오니 아름다운 해변이 차창 밖에 펼쳐진다.
    해안도로
    점심 식사후 식당 근처의 시가지
    관공서인 듯한데 주차장에 오토바이가 엄청나게 많다.
    전승기념탑인지. 위령탑인지 이런 건축물이 곳곳에서 자주 눈에 띈다
    실내체육관 인듯
    스타디움
    사원인가 보다
    다낭에서 호이안으로 가는 해안가에 이러한 리조트가 이어진다.
    고급 빌라촌?
    리조트 건설현장
    ☞ 호이안 고대도시 ☜ 후에(Hue)에서 4시간, 다낭(Da Nang)에서 남쪽으로 약 30km에 위치한 고대의 항구도시 호이안은 17세기의 옛모습을 고스란히 담고있는 복고적인 외관이 멋스러운 도시이다. 베트남의 중앙부에 위치한 이 도시는 하노이와 호치민 만큼 우리에게 잘 알려져 있지는 않지만 베트남 시민들이나 베트남을 잘 아는 여행자들은 한결같이 최고의 여행지로 호이안을 손꼽는다. 다른 대도시처럼 아오자이를 휘날리며 달리는 오토바이의 물결도 없고, 줄지어 세워진 빌딩도 없지만 호이안은 깨끗하게 잘 정돈된 시가지에 옛 모습을 잘 보전한 매력적인 도시이다. 참파(占婆)왕국 때부터 중국과 일본을 비롯하여 포르투갈, 프랑스 등 서방 국가의 상인들이 빈번히 드나들면서 19세기 무렵까지 해상 실크로드의 중요 거점인 동서 무역의 요충지로 번영을 누렸던 호이안은 16~17세기에는 일본인들의 이주가 많아지며 일본인 마을이 생기기도 하였다. 때문에 도시 곳곳에 중국과 일본 문화의 흔적을 찾아볼 수 있고, 프랑스 식민지 시절의 흔적이 남아 있는 유서깊은 도시이다. 약 180년 전의 거리가 지금도 남아있는 구시가지. 오래된 목조 가옥들이 늘어서 있는 거리는 동남아시아에서 최고라고 하며, 1999년에 세계 유산에 등록됐다.
    내원교 근처에 있는 베트남, 중국, 일본의 건축 양식이 혼합된 목조 가옥. 약 200년 전에 무역상이 지은 집으로 현재 살고 있는 8대째 후손인 여자 주인이 집의 내력에 대해 설명해준다. 내부에는 가내수공업으로 만든 토산품점이 있다.
    옛 모습을 고스란히 보존하고 있는 도로, 단층 혹은 2층의 낮은 목재 기와집들이 늘어서 있는 골목
    고풍스러운 가구들에서도 세월의 깊이를 느낄 수 있다.
    1593년 일본인들이 세웠다는 목조지붕이 있는 다리로 일본인 거리와 중국인 거리를 연결시켜주는 역할을 했다. 개와 원숭이 조각상이 다리의 양끝을 지키고 있으며 다리위에는 항해의 안전을 기원하고자 하는 절이 있다.
    참파왕조 부터 구엔왕조에 걸쳐 유럽과 아시아를 연결하는 호이안의 역사를 보여 주는 박물관
    복건회관(福建會館) 짠푸(Tian Phu)거리에 위치하고 있는 화교들의 집회지이다. 고향이 중국의 복건성인 사람들이 모이는 장소로서 지금까지 사용되어지고 있다. 건물 역시 중국식 기와집으로 빨간색과 노란색을 많이 사용한 화려한 건물이다. 회관 내부에는 제단이 잘 설치되어 있다
    매달려 있는 원통 스프링 모양의 향이다. 타는데 몇날 몇일은 갈 것 같다.
    복건회관(福建會館) 뒤편 정원에서 '한알회' 멤버 8명 모두가 한데 모였다
    호이안은 다른 주요 지역에 비해 비교적 전쟁의 상처를 거의 입지 않아 보존이 잘되어있다.
    호이안의 주택이나 상가, 사원, 사찰 등 각종 건축물이나 우물, 다리, 묘지 등 800개가 넘는 역사적 유물들이 당국에 의해 보호되고 있다한다.
    유네스코 세계 문화유산으로 지정된 호이안의 옛 거리(Pho co Hoi An)는 차량이 통제되고 건물의 개축과 높이에 대한 규정이 엄격히 통제되고 있다한다.
    번성했던 항구가 토사로 수심이 얕아져 기능을 잃고 이웃한 다낭으로 옮겨간 뒤로 정체되었다 한다.
    고대 도시를 이곳 저곳 거닐어 본다.
    ☞ 마블 마운틴(오행산) ☜ 다낭 해변가 차이나비치 근처의 마블 마운틴은 모두 다섯 개의 봉우리로 구성되어 있는데, 각각 후아손(火星),투이손(水星),목크손(木星),킴손(金星),토손(土星)을 나타내고 있다고 한다. 화성을 나타내는 표고 108m의 가장 큰 봉우리에는 석회암의 용식작용으로 인한 거대한 천연동굴들이 많이 생성되었는데 그 속에는 불상이 안치되어져 있다. 이 곳은 불교나 힌두교의 성지로서 신성시되고 있다고 한다. 이러한 천연동굴들은 베트남 전쟁당시 주로 베트콩들의 은신처로 이용되기도 했다고 한다. 이곳에서 계단을 올라가면 마블 마운틴 전망대가 있는데,그곳에서는 다른 4개의 산과 산기슭에 옹기종기 모여 있는 마을의 풍경이 아름답게 펼쳐진다. 또한 전망대 뒤편에는 1968년 베트남 전쟁 당시 이곳에 베트콩이 주둔하고 있다는 정보를 입수한 미군이 공격을 강행하여 생긴 깊이 15m정도의 굴이 있다. 이곳 또한 불상이 안치되어 있어 신비로운 분위기가 감돌고 있다. 산기슭에 있는 논누오크 마을에는 대리석을 조각하는 수많은 공장들과 상점들이 들어서있다. 마블마운틴에 도착
    동굴입구
    이곳에서 죄를 달아 지옥으로 내려 보낼지 천당으로 올려 보낼지 결정하는가 보다.
    지옥문을 통해 동굴 아래로 향한다.
    조각은 조잡하지만 뜻은 잘 전달되어질 듯하다.
    가이드 말로 이 여자는 이승에서 창녀였단다.
    죄 짓지 말고 착하게 살아 천당 갑시다!
    천국으로 오르는 가파른 동굴내 계단
    동굴 계단을 다 오르면 밖으로 나오고 탑이 나타난다. 결국 천국은 이승인가?
    아래 마을이 모두 대리석 조각 공장이다.
    당겨 보았다.
    동굴내 벽화
    동굴내 벽화
          동굴을 나서며
    입구의 공예품 상점
    산 위를 올려다 보니 동굴을 통해 올라갔던 천국의 탑이 보인다.
    상점 가득한 다양한 공예품
    멀리 오행산이 보인다.
          100년이 넘었다는 성당
    소박한 성당내부
    공사현장, 외부 비계가 아주 위태로운 가운데 외부 작업을 하고있다.
    ☞ 참조각 박물관 ☜ 4∼13세기 동안 남 베트남을 지배하던 인도네시아 계통의 참파 왕국의 유적지인 미손의 유적을 전시하고 있다. 참 문화는 한마디로 인도의 영향을 받은 힌두교적 요소에 불교적 요소를 약간 가미한 모습이다. 1915년에 참파 유적을 연구하고 집대성했던 프랑스 학자 '알린 파루만티'에 의해 세워졌으며, 참 족의 가장 뛰어난 유물 몇 점은 이들 프랑스인에 의해 프랑스로 옮겨지기도 하였다. 이 박물관에는 참(Cham)파의 유적으로부터 출토된 조각 예술품과 석상이 있다. 문화에 관한 한 세계에서 가장 진귀한 소장품들을 보유하고 있다고 해도 과언이 아니다. 특히 내부에 진열되어 있는 구원과 파괴의 신인 힌두교 시바 신을 조각한 석조품과 유방형 받침대 위에 놓인 링가는 대단한 예술성을 보인다. 또한 아름다운 산 모양의 석조도 전시하고 있는데 가장 유명한 석조 작품만도 3백여 점이다. 그 외에 작품의 대부분이 연안 사암을 재질로 하고 있는 힌두교 신상,건축물 기단의 벽면 조각품 등이 많다. 한 기단의 조각품 중에는 방에서 피리를 불고 있는 참파 인의 조각이 새겨져 있다. 참조각 박물관 입구 전경
    전시물을 만지는 것도, 촬영하는 것도 제지를 하지 않는다.
    베트남 집 둘레에 심는 짜오나무 열매인 까오, 제사상에 올려지며 이가 검게(흙치)된단다.
    링가와 요니 조각
    ☞ 씨클로 투어 및 야경 ☜
          씨클로를 탑승한 반쪽이와 기사. 무공해인줄 알았는데 기사분의 담배 연기 매연이 심했다.
    다낭항구
    야경
♬ 우리들의 이야기 / 윤형주 ♬